2013년 2월 17일. 폴란드 여행.

 

400여 Km 되는 먼거리 여행이라... 새벽 5시에 출발 했다.

 

1447년 창설된 성니콜라스 성당과 박물관 등은 가족과 나중에 따로 가보기로 하고... 이번에 가는 곳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Auschwitz)에 가보고자 함이다.  


도시 이름은 오슈비엥침(Oświęcim). 오슈비엥침은 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의 원래 폴란드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라는 독일의 느낌이 많이 나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점이 이상해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이하  그대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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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남서 약 60Km, 소와(Soła)강과 비스와(Wisła)강 합류점 부근에 위치한 오슈비엥침은 화학, 피혁, 농기구 제조 등이 주업인 인구 약 42,000(2004년)의 작은 공업도시다. 최초로 문헌에 오르는 것은 1117년이고 1179년에는 크라쿠프 대주교구에서 분리돼 오폴레(Opole) 공국의 통치를 받았다.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했으며, 폴란드가 분할되는 1772년 합스부르크가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918년 독립한 폴란드공화국에 귀속되었다.


   폴란드침공을 위한 독일의 작전계획, ‘백색의 경우’(Fall Weiß, Case White)는 1939년 8월 비밀리에 수립되었다.      이 작전은 폴란드 정규군이 독일령 라디오방송국을 공격했다는, 나치스가 조작한 소위 글라이비츠(Gleiwitz)사건을 구실로 폴란드를 북부, 남부, 서부 삼 방면에서 침공한다는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암호명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독일 공군이 폴란드 비엘룬(Wieluń)시를 기습 폭격하고 친선방문으로 위장한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Holstein)호의 포문이 단치크(Danzig) 교외의 폴란드 요새를 향해 불을 뿜으면서 히틀러 정예부대가 국경 너머로 진격을 개시, 인류사상 최대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그 막을 열었던 것이다. 사전에 밀약한 대로 폴란드 영토의 서쪽 절반을 독일군이 차지하고 동쪽 나머지를 9월 17일 침입한 소련 군대가 점령한 다음, 개전 꼭 한 달 5일 만에 폴란드에서는 총성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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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폴란드 침공과 함께 가장 먼저 오슈비엥침-브제진카 (Oświęcim-Brzezinka)를 점령하고 지명을 독일식 호칭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로 바꾼다. 첫째, 그곳이 가장 중요한 중화학공업 지역이었고. 둘째, 폴란드 야전군 사령부가 있었으며 셋째, 지형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유럽의 복판이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 영국 런던과 러시아 모스크바, 그리스의 아테네가 같은 1,400Km 거리에 있고 스페인 남단의 지브롤터(Gibraltar)와 북쪽 스칸디나비아 끝까지가 약 2,400Km로 유럽 모든 나라가 그 안에 들어온다.


나치스 독일은 소련 영토까지 고려한 동부유럽 식민계획을 구상하면서 장차 필요하게 될 노동력의 확보와 인종통제를 위해 강제수용소 건설을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 추정인원 120만 명이 학살되는 최대급 홀로코스트(Holocaust)의 현장이 이곳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홀로코스트란 조직적으로 이뤄지는 대량학살을 통칭하지만 좁은 의미로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한다.

독일의 나치스정권은 아리안(Aryan)족의 우월성이라는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지배민족의 순혈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인 정적,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자 등 그들 가치관에 비춰 불결하다고 판단되는 열등민족을 거세하기 위해 줄기차게 정책을 추진했다. 1933년 단종 법을 제정하였고 1935년 9월 15일 ‘독일인의 피와 존엄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인 뉘른베르크 법(Nürnberg Laws)과 독일제국공민 법을 공포하여 유대인과 독일인의 피가 섞이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독일 내 유태인의 독일국적과 공무 담임권을 박탈하고 유태인과 독일인의 결혼 및 성관계를 금지했으며 이를 위반한 자는 강제노동 형에 처한다고 규정한 것으로 이것이 훗날 유태인 학살의 법적 근거가 됐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1940년에는 안락사정책 T4작전으로 수천 명이 살해되는데 전쟁 국면이 악화되면서 나치스가 ‘절명수용소’를 도입하기까지 살해수단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절멸수용소(Extermination camp)란 단순한 강제수용소와는 달리 수백만 명의 인명을 살육하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을 말한다.

1942년 1월 국가보안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Heydrich) 주재로 열린 반제회의 (Wannseekonferenz)에서 토의된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 의사록에 의하면 유럽에 거주하는 1,100만 유대인 숫자의 확인과 함께 그 ‘최종적 해결’이 결정된 것으로 돼있다. 직접 살육을 뜻하는 표현은 없지만 대량학살을 의미하는 음어로 해석하는 것이 통설이다. 단 이 회의에 관한 공식문서는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1940년 5월, 설립명령에 의해 폴란드군 막사를 이용한 아우슈비츠 제1강제수용소가 축조되고 수용소장으로 루돌프 회스(Rudolf Höss)가 임명된다. 처음에는 폴란드 지하단체 활동가나 국가의 지도자급 인물, 지식계급 등 국사범을 수감했으며 여기서 처형된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 후 나치는 유럽 각국의 유대인, 집시, 소련군포로를 이곳으로 보내오기 시작했다. 수용인원 증가에 따라 1941년10월 브제진카 마을에 근 10배에 달하는 대규모의 아우슈비츠 제2강제수용소 -비르케나우가 건설되고 다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대기업 제조시설이나 근방 탄광의 부설형태로 아우슈비츠 제3강제수용소 -모노비츠 (Monowitz)가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증설되었다.

수감된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노르웨이. 리투아니아, 그 외 독일 점령국 총 28개국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정치범, 로마(Roma)라고 불리는 집시, 정신장애자, 동성애자, 전쟁포로와 성직자들 그리고 그들을 숨겨준 사람으로 절정기였던 1943년에는 아우슈비츠 전체에서 그 수가 1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는 노력동원을 목적으로 한 강제수용소이자 동시에 절멸시설의 기능을 아울러가진 최대의 수용소였다. 독일 통치하 각 지방에서 화차로 운반된 피수용자는 인종, 종교, 사상 등 기준에 의해 분류되고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처분됐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역에 적합지 않은 아녀자, 노인을 처분대상으로 포함시킨 구조적 문제가 더 많은 비극을 만들어낸 요인으로 지적되는데 수용소 도착 직후 선별된 70% 정도가 아무런 기록 없이 가스실로 보내졌다는 설도 있어 총 수용자의 정확한 숫자가 현재까지도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희생자의 시체는 보석, 금니, 안경, 모발 등 재사용 가능한 재료를 수거한 후 소각돼 재로 뿌려지거나 집단묘지에 매장되었다.

1944년 말, 소련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진격하자 나치스는 수용소를 폐쇄하고 남아있던 약 6만 명을 독일 본국으로 이송하는 한편 거기서 일어난 일을 은폐하기 위해 주요시설을 조직적으로 파괴 해체한다. 1945년1월27일 소련군이 진주하여 제1강제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때 철조망 안에 귀신같은 몰골로 살아있던 피수용자의 인원은 약 7,600명뿐이었다. 그 중에서 안타까운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 조국으로 귀환한 소련사람과 포로가 적에게 협력한 반역자로 몰려 다시금 자기나라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절멸정책 희생자 외에도 열악한 환경과 식량사정, 만연하는 전염병, 가혹한 노동과 징벌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종전 직후 소련은 400만 명이 학살됐다고 발표했지만 현재는 과장된 숫자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있는 위령비에도 400만이던 사망자 수를 1995년 150만 명으로 고쳐 적을 만큼 근거가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근간 객관적 연구를 거치며 숫자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수용자 총수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사망자의 확정적 수치도 아직 파악되지 않는 상태이다. 다만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 수는 유대인이 510만, 기타 집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동성애자 등 50만으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고 한다. 전후 수용소는 폴란드 공산정권에 의해 일부 해체되고 방치돼 수십 년간 찾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1989년 자유화 이후 죽음의 유적지로 관심을 끌면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줄을 이어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79년 유네스코는 제3제국에서의 체계적 인종 학살이 이뤄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제1, 제2 두 집단수용소에 대하여 인류사상 이 같은 과오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염원을 담아 ‘부의 자산’으로서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인정하였다. 유네스코의 2007년 보도 자료에는 아우슈비츠 사망자를 120만으로 기재하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폴란드군대가 병영으로 쓰던 건물을 접수하여 1940년 5월 20일 개설 후 증설된 28개 수용동(블록)이 6,000볼트 고압전기 철조망에 2중으로 둘러싸인 채 네모진 대지 안에 세 줄로 서 있다. 시골 학교나 공장 기숙사 같이 생긴 건물은 정문에서 가장 먼 남쪽 줄 왼쪽을 1블록으로 하여 오른 편으로 가면서 11블록까지, 가운데 줄은 12부터 21블록, 맨 앞줄은 22부터 28블록까지 번호가 붙어 있으며 앞줄 중앙이 되는 정문 옆에는 주방이 딸린 별동 건물이 점호광장, 집단교수대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28개 블록 중 전시실로 사용되는 것은 15개 정도인데 그중 4~7블록을 주로 보게 되며 죽음의 수용동(Death Block)으로 불리는 11블록은 상상을 초월하는 징벌시설이 있어 빈번히 언급되는 곳이다. 12~21과 27블록에는 폴란드 및 주변국의 자료가 희생자의 출신 국별로 전시돼 있다.

정문에서 곧바로 걸어가 맨 뒷줄에서 만나는 제4블록으로 들어간다. 유대인 절멸계획, 수용소 입지와 건설과정, 가스실과 소각로의 구조, 희생자의 명부, 살해와 처리과정, 소각장면 등이 주로 사진과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그 옆 동, 제5블록으로 옮겨가면 안경, 의족, 식기, 신발, 트렁크, 브러시, 기타 희생자의 소지품이 이어지는 방마다 산처럼 쌓여있다. 몰수된 피해자의 휴대품은 수시로 독일 본국에 보내졌고 마지막 철군 시 35개 창고에 남아있던 것을 소각했는데 이 물건들은 그 중 타지 않은 여섯 개의 창고에서 나온 유품이라고 한다. 안경을 뺏으면 일을 못할 테니 죽음의 현장에서 주워 온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에 서로 엉켜 붙은 둥근 테가 더욱 처량해 보인다. 의수, 의족 찌그러진 구두와 식기도 참담하지만 페인트로 이름, 주소가 적힌 트렁크를 보며 불현듯 저려오는 가슴을 느낀다. 지금은 저 세상에 있을, 빛바랜 이름의 주인들은 다시 찾을 생각으로 이 글씨를 썼을 것이다. 수용소의 죄인들은 번호로 식별되고 성명마저 몰수됐다는데 이것이 자기 이름을 적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어둑한 방에 수북이 쌓여있는 머리털을 봤을 때, 아니 머리털이라고 알아 봤을 때의 그 음산한 기분도 적당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여자들 머리를 깎아서 독일로 보내 옷감이나 매트리스를 만들었다며 그 견본이 전시돼 있다. 해방될 때 소련군이 창고에서 발견한 변색된 머리털이 약 7톤이 이르렀다고 한다. 수용소 입구에서 촬영 금지 간판을 본 기억이 있어 처음에는 사진 찍기를 조심했는데 신경 쓰는 사람도 제지하는 사람도 없어 모두 자연스럽게 플래시를 터뜨린다. 발길에 닳아 움푹 들어간 계단을 지나 제6블록으로 넘어간다.

독일 제3제국 나치스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내뱉은 말이 있다. “이른바 반유대주의라는 것은 인도 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나 벼룩 퇴치와 똑 같은 위생상의 문제다.”

수용소에 도착한 수인들은 위생상의 절차를 밟기 시작한다. 먼저 옷을 벗고 이름대신 부여된 번호를 문신으로 팔에 새겨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박탈당한다. 머리를 깎인 후 샤워, 소독을 받고 죄수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세 방향에서 사진을 찍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급된 딸깍대는 나무 신을 끌고 다녀야 했으며 세로 줄무늬 수인복에는 역 삼각형의 와펜을 붙였는데 정치범은 적색, 형사범은 녹색, 유대인은 황색이었다. 6블록 복도에는 번호, 이름, 생일, 사망일이 적힌 뼈만 앙상한 죄수복의 사진이 가득 걸려 있으며 유족이 다녀갔는지 꽃이 꽂혀 있는 액자가 보인다. 수용 인원이 증가하면서 가스실로 직행한 사람은 이 사진도 없다고 한다. 방안에는 수인을 가장 괴롭혔다는 점호와 징벌의 모습, 식당과 수용자가 그린 그림 등, 일상생활을 엿 불 수 있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제7블록은 수용된 사람들의 잠자리를 재현한 곳으로 복도를 지나면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보게 된다. 초기에는 짚을 넣은 포대를 바닥에 깔고 잤는데 나중에는 붉은 벽돌로 격리된 3단 침상에 짚을 깔고 두 사람씩 자게 된다. 1열로 놓인 수세식 변기가 있는 화장실도 볼 수 있다.

  

10블록과 11블록 사이의 중정은 수천 명이 총살된 장소로 4면이 벽돌 벽으로 높게 막혀있고 뜰로 면한 10블록의 창은 사형집행을 볼 수 없도록 전부 검은 목판으로 막혀있다. 앞길에서 쪽문을 통해 들어가면 맞은편 벽돌담에 붙어있는 죽음의 벽(The Death Wall)이라고 불리는 여섯 쪽으로 된 콘크리트 판이 보인다. 옆 동 11블록에 끌려와 사형선고를 받은 수용자나 체포된 폴란드 지하 조직원들이 벌거벗긴 채 벽 앞에 돌려 세워지고 독일 친위대(SS)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현장으로 지금도 탄환 자국이 생생히 남아있다. 방문하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동족이 바친 헌화가 끊이지 않는데 오색 꽃 속에서 오늘 흘린 피같이 붉은 빛이 유독 선명하다.

아직까지 본 수용블록은 박물관으로 공개하기 위해 내부를 개조한 것이지만 죽음의 벽과 이제부터 보려는 제11블록은 당시의 형태가 그대로 보존된 곳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 처형실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장소가 제11블록이다. 재소자들에게 죽음의 블록(Death block)으로 알려진 이 11동은 독일 친위대원이 근무하던 곳으로 카토비체(Katowice)에 있던 나치스 정치경찰 게슈타포(Gestapo)의 분견대이자 수많은 규제에 걸려든, 위반자가 잡혀와 처벌되던 감옥 속의 감옥이었다. 죽음의 벽에 가까운 우측에 친위대사무실이 있고 그 외의 1층 방은 죄수들이 대기하거나 판결을 받던 장소로, 땅에 떨어진 사과를 주웠다거나 노동시간 중에 배설을 했다는 등 엄청난 죄과에 대하여 적절한 형벌이 내려졌다. 많을 때는 세 시간 사이에 백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며 총살로 판결된 죄인은 복도 중간에 있는 탈의실에서 알몸이 되어 옆문을 통해 죽음의 벽으로 끌려 나갔다. 왼편 마지막 방에는 이곳에 수용됐던 화가 시베크(Wladyslaw Siwek)가 묘사한 재판과 총살의 복사판 그림이 전시돼 있다. 처형된 시체가 잔뜩 실린 수레를 동료 죄수 여럿이 허리 굽혀 끄는 그림도 있는데 욕된 생지옥 속에서 비굴하게 이어가는 모진 목숨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기게 한다.

지하실로 내려가면 개인적 징벌 시설인 감방이 있어 처절함은 한층 가열해진다. 당시 상태 그대로라는 음산한 지하 감방에는 규칙을 위반한 재소자, 그들을 구하려던 일반시민이 수용됐으며 정기적으로 ‘지하 청소’라는 선별작업을 거쳐 총살형이 집행되던지 아니면 징역형으로 넘겨졌다고 한다.

지하에서는 세 종류의 감방을 볼 수 있다. 18호실은 아사 형을 집행하는 감방으로,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 받지 못한다. 수용소에서는 탈주자 한 사람이 생길 때마다 열 사람이 처형됐다는데 굶어 죽도록 결정된 열 명중 한 사람의 벌을 대신 받기로 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폴란드의 막시밀리안 콜베(Maksymilian Kolbe) 신부가 1941년 죽어간 곳이 이 감방이다. 꽃다발 몇 개가 놓여있는 침침한 방에는 동족들이 계속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콜베 신부는 1982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됐으며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Penderecki)는 그의 곡 ‘폴란드 진혼곡’의 일부로 ‘디에스 이라에’(Dies irae, 분노의 날)를 작곡하였다.

 

20호실은 질식시켜 사람을 죽이는 감방이다. 작은 창 하나뿐인 좁고 어두운 방에 많은 사람을 가두어 서서히 숨을 못 쉬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촛불을 켜서 산소 소모를 촉진시켰다고 한다. 22호실은 죄인을 세워놓고 앉지 못하게 하는 좁고 낮은 감방이다. 0.9m 사방의 좁은 공간에 네 사람을 집어넣어 밤새 세워놓고도 낮에는 다른 수인과 함께 노역장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참혹한 형벌을 생각해 낸 것이 인간의 머리란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이곳은 사람의 세상이 아니었다. 죽이는 자도 죽는 자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선량한 인간의 본성을 믿고 싶은 마음에서, 감히 사람이 이렇게까지는 될 수 없다는 근거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11블록에서는 유대인 절멸을 위해 1941년 9월3일, 치클론 B(Zyklon B) 가스에 의한 집단학살의 실험이 행해져 소련군 포로 약 600명과 병원에 입원 중인 250명의 수용소 환자가 희생됐다. 계속되는 총살 집행으로 친위대원의 정신적 부담이 가중되는 한편 총탄 사용의 비효율성이 지적된 결과 ‘생산적 처분’을 위해 새롭게 제시된 방법이 가스 처형이었으며 이로부터 별도로 운영되는 가스실을 통해 학살이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수용소에 진입한 소련군은 창고에 대량으로 쌓여있는 치클론 B의 빈 통을 발견한다. 아우슈비츠 출신 유대계 독일인 파울 첼란(Paul Celan)은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 1952)에 수록된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에서 독가스를 ’새벽의 검은 젖‘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한낮에, 아침에, 밤에 마신다.‘ 고 읊었다. 그 녹슨 젖통은 전시실 우리 눈앞에 지금도 수북이 쌓여있다.

치클론B는 발진티푸스의 매개체인 이를 구제하기 위해 개발된 살충제로 제조 판매를 담당한 독일의 데게슈(Degesch)사는 1941년부터 44년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수익을 올렸다하며 42년부터 43년까지 아우슈비츠에 송달한 20톤의 납품서가 남아있다. 전후 재판정에서 회스 전 수용소장은 1,500명을 살해하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1블록에서 앞으로 나와 첫째와 둘째 줄 건물사이의 통로를 동쪽으로 걸으며 오른쪽 21에서 12블록까지의 국가별 전시관을 몇 개 구경한다. 왼쪽 중간쯤, 식당 건물 앞 점호광장에는 본보기로 공개처형을 집행한 집단교수대가 복원돼있다. 당시 교수형을 보고난 수용자 중에는 공포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고압 철조망에 스스로 감전, 자살을 택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동쪽 끝 철조망 밖에 있는 건물이 소각로와 가스실이다. 그 입구 앞에 작은 교수대가 하나 서 있다. 종전 후인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의 전 수용 소장이던 루돌프 회스(Rudolf Höß)가 처형된 자리다. 쳇바퀴처럼 얽혀 돌아가는 업보의 숙명, 끊지 못하는 카르마(karma)의 슬픈 사슬을 여기서 한번 다시 본다.

아우슈비츠의 핵심인 가스 처형 실은 반 지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78.2평방미터의 방으로 소각로 중 시체 안치소로 사용되던 큰 방을 가스실로 개조한 것이다. 텅 빈 바닥에 촛불이 흐느끼듯 어른거리고, 낡아빠진 얼룩투성이 콘크리트 벽을 너덧 개 전등이 흐릿하게 비추고 있다. 건물 위로 솟아있는 굴뚝만 아니라면 이곳이 참혹의 현장이란 것을 알 수 없다. 아우슈비츠의 수인들이 후렴처럼 들었던 말, “당신들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야. 여기서 나가는 길은 굴뚝으로 통하는 것뿐이야.” 했던 집으로 가는 그 굴뚝이다.

샤워를 시켜준다며 알몸의 피해자들을 방으로 몰아넣고 문을 닫은 후 천정에 있는 구멍에서 치클론B가 투입됐다. 숨질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20분, 지금 콘크리트 벽은 매끈하지만 당시에는 숨을 못 쉬고 괴로워하는 희생자의 손톱자국이 무수했다고 전한다. 금니, 반지 등 귀금속을 빼내고 머리카락을 자른 후 시체를 소각로(Krematorium)에서 태우고 재는 연못에 뿌렸다. 쏟아져 나오는 시신을 미처 처리하지 못할 때는 동료들이 인근 공터에 집단으로 매장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나치스가 대량으로 생겨나는 사체의 이용방법을 여러모로 강구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머리털을 직포로 만든 외에 뼈는 재떨이나 페이퍼나이프로, 골분과 재는 비료로 사용했고 몸체로는 비누를 만드는 실험까지 했다. 아직 볼 기회가 없었지만, 알랭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1955년도 다큐멘터리 영화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에는 피부로 만든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목 잘린 몸통에서 비누용 지방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고 한다. 집단 광기의 제노사이드(Genocide)이자, 아비지옥의 홀로코스트,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말이 멈출 때 음악이 시작된다고 하이네는 말했다. 강력한 충격과 상실감, 멍해진 머릿속에서 울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수난(Matthäus Passion)곡, 그 절규가 촛불의 어스름을 장중하게 채운다.

- 붙잡힌 예수를 노래하는 소프라노와 알토, 이중창 사이사이 부르짖는 민중이 합창으로 가세한다.

“늦춰라, 놓아라, 풀어줘라!” 아우성은 이어진다. “번개도 천둥도 분노를 잊었단 말인가? 헤아릴 수 없는 공포의 구렁이여, 변절의 배반자를, 무자비한 무리들을, 진노의 격정으로 부수고 덮치고 삼키고 없애버려라!”(Nr.33)

- 예수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레치타티보는 사연을 읊어나간다.

“보라, 신전 장막은 위에서 아래로 두 조각에 찢기고, 대지가 요동치며 바위가 갈라지도다. 무덤은 입을 열고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 살아 나오도다.”(Nr.73)

11시40분, 제1수용소를 나와 아우슈비츠 제2강제수용소 -비르케나우로 가기 위해 브제진카 마을로 향한다. 주차비는 3유로, 체코와는 달리 유로화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모양이다. 북으로 향하다 나타나는 비르케나우 표지 따라 서편으로 좌회전 곧 망루같이 생긴 정문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나타난 서너 명 젊은이가 무작정 비눗물 막대로 앞 유리를 문지르더니 돈을 내라고한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차를 비워 논 사이, 분풀이로 긁기라도 하면 우리만 손해니 많지 않은 돈 10즈워티를 주기로 했다. 폴란드 돈이 없다고 하니 2.3유로를 받아간다.

제1수용소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 독일어로 비르케나우에 건설된 제2수용소는 폴란드인 희생자가 많았던 제1수용소와는 달리 당초부터 유대인의 근절을 목적으로 만든 대규모의 살인시설이었다. 수용소는 몇 개 관구로 나눠질 만큼 규모가 컸으며 1944년 8월 점호 때 재소자수는 남녀 합쳐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이 부족하고 쥐가 득실거려 여러모로 결함이 많은 장소였지만 나치스는 4동의 소각로, 농가를 개조한 가스실, 처리하지 못한 시체를 불태우는 야외소각장 등 거의 모든 학살 장치를 이곳에 설치했다.

1.75평방Km의 허허벌판에는 300동 이상의 막사가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도로 좌측, 45동의 벽돌 건물과 도로 우측, 망루 전면에 늘어 선 목조 바라크 22동뿐이다. 철로 인입선 종점 부근에는 가스실과 소각로의 자취가 남아있으며 그 앞에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제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12시 정각, 수용소 전면을 막고 서있는 붉은 기와 붉은 벽돌의 건물로 걸어간다. 나치스 친위대 초소가 있었다는 옆으로 긴 단층 건물 중앙에는 삼각지붕의 2층 감시탑이 솟아있고 흡사 두 눈 같은 창문 아래 커다란 정면 출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비르케나우의 상징처럼 돼있는 ‘죽음의 문’(Death Gate)이다. 그 밑으로 뻗어 들어간 두 줄 철로가 하얀 도로와 평행으로 넓은 풀밭을 가로질러 800m 멀리 곧게 수렴돼 간다.

문을 통하여 넓은 창공과 숲이 보인다. 60여 년 전 철길로 실려 온 비운의 수인들은 창 없는 화차에서 내려 눈부신 하늘을 쳐다보며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건물위로 하늘은 이어졌지만 무심히 통과한 문 안에는 아직까지 살아 왔던 것과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다. 바로 눈앞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 앞에 놓인 순식의 삶을 그들은 얼마만한 집착으로 지탱했던 것일까? 몇 년, 몇 십 년 세월을 소거하면 죽인 자나 죽은 자나 다 같이 죽어 있을 터인데…. 누구나 가야 할 필연이지만 운명을 예감한다는 것, 또 그것이 목전에 있다는 처지에서 이만한 공포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강요당한 운명이라는 사실 때문인가. 그 보다는 유린당한 자유와 인간성, 빼앗긴 가족과 사랑 때문이었을까?

1944년 모노비츠 제3수용소에서 10개월을 보낸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에서 수용소의 비극을 증언한다.

레비에게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짓밟혀 박탈당하는 상황이었다.

-사랑, 집, 자신의 습관, 옷 등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극한상황에서 수인번호로 인식되며 물건처럼 취급받는 그들,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지켜야 할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범죄자가 없고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에서 고통과 욕구만 남긴 채,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아주 빠르게 배워 나간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1 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곤충의 허물처럼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사람,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말없이 중노동으로 행진한 사람. 그들은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날 기계 부품처럼 죽어가고 또 그만큼 채워졌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권력자에 선택된 잔인하고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레비가 슬퍼하면서 주목한 것은 유대인 특권층이었는데, 친위대원들보다도 더 죄수에게 포악했고 악질적이었던 동족 감독 카포(Kapo)는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결함들 덕분에 일반규정을 면제받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자리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치즘은 희생자들을 타락시켜 끝내 자신과 닮도록 만들었다.

수감자들에겐 자살조차 사치였다.

-물자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들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신의 커다란 불행으로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지옥에서 살아나온 프리모 레비는 42년이 지난 1987년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잠시 기다리면 어차피 갈 68세의 나이, 자살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굳이 철학적 행위를 선택한 그의 사유가 도달한 삶과 죽음의 결론은무엇이었을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빈 들판이 넓게 전개되고 멀리 숲으로 뻗어나간 길 끝에 나직이 검은 형상의 구조물이 보인다. 좌측 풀밭에는 창고 비슷한 단층 벽돌 건물이 질서 있게 늘어 서있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자그맣게 옮겨 다닌다. 바로 눈앞 오른 편에 우중충한 목조 바라크가 줄을 짓고 서있어 그쪽부터 먼저 보기로 한다.

  

동쪽에 나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노출된 지붕 트러스 밑에 영화나 사진에서 보았던 3층 목조 침대가 건물 양쪽으로 촘촘히 놓여있다. 널판 위에 짚을 깔고 한 층에 8명씩 끼워 잤다고 하며 입구 근처에 설치된 벽돌 아궁이와 건물 바닥을 세로로 지나는 굴뚝이 보이는데 형식적이나마 난방장치는 있었던 셈이다. 당초 마구간으로 사용됐었다는 바라크는 제1수용소에 비해 전반적으로 구조가 조잡하며 비슷하게 생긴 막사들 사이에 독특한 형태의 화장실 건물이 끼어있다. 건물 바닥에 변기 대라는 표현이 적절한 콘크리트 통이 세줄 길게 설치돼있고 각각 둥근 구멍이 두 줄 엇갈려 뚫려있다. 제1수용소에서도 화장실을 봤는데 그보다 한결 격식이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처음에는 사용을 꺼리던 수인이 많았으나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어 익숙해지면서 차차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화장실하면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의 겨울, 난데없는 영장으로 입대한 용산 훈련소를 잊지 못한다. 정구장만한 구덩이를 파고 가느다란 통 나무를 쌍으로 수십 개 걸쳐놓은 노천 변소인데 눈비를 피하느라 대형천막을 치고 옆을 말아 올린 말 그대로의 원시시설이었다. 견딜 만큼 참다가 별수 없이 밤중에 찾아갔는데 흐리멍덩한 백열등 밑 여기저기 알궁둥이를 까고 쪼그려 앉은 받침목은 배설물로 디딜 자리조차 없고 휘청대서 균형을 잡기 힘들다. 빠지면 끝장이니 눈도 감지 못하겠고 언뜻 후각과 시각을 어지럽히는 밑이 보이면 그 참경에 기겁을 하고 만다. 다행히 1.4 후퇴로 2주 만에 고별은 했지만 60년이 돼오는 지금까지 밤새 변소 찾아다니는 꿈을 꾸는 것이 필시 그때 겪은 공포 탓이다. 거기 견주면 화장실에 관한 한 비르케나우는 긍지를 가져도 좋을 만하다.

서쪽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로 나가다 왼편 벽돌 바라크를 향해 넓은 풀밭으로 들어간다. 그때 그 시절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내부는 대부분 수십 년 방치된 황량한 모습이다. 이 부근은 주로 여자들이 수용됐던 장소라며 엉성하게 노출된 지붕구조로부터 벗겨진 벽돌 벽에 놓여있는 3층 침상까지 제1수용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조가 빈약하다. 당시에는 창문을 통해 화장터 굴뚝 위로 불꽃이 보였다고 한다. 새로 온 수인이 나이 많은 여자에게 저 불길이 뭐냐고 묻는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 살아남은 한 여인이 아픈 추억을 되살리며 했다는 말이다.

막사의 범위가 넓은데다 관광객이 거의 없어 필여사하고도 떨어져 자주 혼자가 되는데 폐가처럼 침침한 건물 구석에 서면 정적에 잠긴 공간에서 귀신이 나올 듯 섬뜩해진다. 이 속에서 구더기같이 굼실대던 군상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습지 위에 기초도 없이 세워졌다는 바라크는 맨 흙바닥이고 옆 동으로 옮겨 갈 때마다 신발이 진흙에 빠진다. 나막신을 끌고 진창 속을 걸었다는 프리모 레비의 수기 그대로다. 1965년 아우슈비츠를 다시 찾은그는 비르케나우에서 무엇보다도 이 진흙을 보며 심한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남쪽 끝 부분에서는 목조 바라크에 있는 것과 같은 콘크리트 변소와 타일로 만든 세면대를 볼 수 있다.

  

다시 중앙 도로로 나가 벌판 끝까지 걸어간다. 직선으로 뻗어 나온 철로의 막다른 끝에 한 송이 장미와 촛불이 놓여 있다. 비르케나우의 정문인 ‘죽음의 문’이 희미하게 멀리 보인다. 1944년 5월에 완성된 철로 인입선이 끊긴 부근에 가스실과 제2부터 제5까지의 4개 소각로가 있었다. 제1소각로는 제1수용소에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수용소 안에서도 종착점 이었던 소각로와 가스실은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후퇴하는 독일 친위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고 지금은 무너져 내린 삼각지붕과 벽돌더미의 잔해로 남아있다.

제2와 제3소각로 사이에 나치스 정권 하의 아우슈비츠 사망자를 추모하는 검은 색 국제위령탑이 서있고 죽은 사람 숫자만큼 돌을 깔았다는 땅바닥에 희생자의 나라 따라 다른 말로 적힌 20개 정도의 비석이 놓여있다. 1967년 4월 거행된 제막식에는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하여 12만에 이르는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가릴 것 없는 널찍한 풀밭 한가운데로 근 1Km의 직선 도로를 걸어 정문 붉은 건물까지 나온 후 사방이 유리로 된 죽음의 문 2층, 망루에 올라 마지막으로 수용소 전체를 내려다본다. 좌우로 1.5Km가 넘도록 한 눈에 들어오는 광대한 살인시설은 철조망으로 구획된 몇 개 블록으로 나눠져 있고 파괴돼 없어진 막사 자리에 벽돌 굴뚝만 나란히 서있다. 눈 아래로 뻗어 나간 철길이 플랫폼을 만들며 세 줄로 갈라져있다. 저 종착점에서 내려 흩어진 무리, 이 자리에서 감시하던 독일 병정들, 60여 년 전 무대의 주인들은 다 사라져갔고 바람 부는 풀밭에 슬픈 역사만 머물러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레비의 마지막 작품에 적혀있다는 경고다.

13시 30분, 주차장으로 나와 차 속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는다. 비누막대로 차창을 닦는 청년들은 경비원을 피해 뒤에 숨어있다 새 차가 도착하면 재빨리 뛰어나와 장사를 한다. 단속하는 경비도 못 본 척 하는 것을 보니 양자 간 상부상조의 양속이 형성돼 있는 모양이다.

14시 비르케나우를 출발, 933번 도로를 택해 북동으로 20Km를 달리고 후샤누프(Chrzanów)를 통과한 입체교차에서 A4/E40으로 진입하며 동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크라쿠프, 바르샤바 표지를 따라 오늘의 목적지까지 45Km, 휴게소가 나타나면 쉬워가며 천천히 운행한다. 기복 없는 평야와 밭 사이를 누비던 길이 발리체(Balice)공항 북쪽을 지나며 7,79/E77로 바뀌고 이내 북쪽에서 고도 크라쿠프 시가로 진입해 들어간다.

여행 출발 전, 인터넷에서 크라쿠프를 검색한 결과 한국 민박은 없었지만 5월에 개업한다는 곳이 하나 있어 카페주소를 가져왔다. 프라하 민박집에 있을 때 PC로 들어가 보니 문은 열었는데 2인실 요금이 1박에 70유로로 프라하보다도 많이 비싸다.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어쨌든 경쟁 없는 일방적 요금이라 크라쿠프에서는 한국집이 아닌 현지 숙소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16시30분, 위치도 짐작하지 못한 채 필여사의 급한 사정으로 무턱대고 눈에 들어온 로열(Royal)이라 적힌 호텔 앞에 차를 세운다. 용변이 급할 때, 시내에서 화장실을 못 찾는 경우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요령이다. 그 동안을 이용하여 관광 안내소를 찾아 숙소를 구해보기로 한다. 넉넉잡고 한 시간, 무슨 수를 쓰더라도 호텔 주차장을 떠나지 말라고 필여사와 단단히 약속한다. 한번 어긋나면 속수무책, 만날 방법이 없다.

길모퉁이를 돌아 시 중심으로 보이는 방향으로 절반은 뛰어간다. 아직 시내지도도 없는 처지라 몇 번씩 뒤돌아보며 지난 길을 머릿속에 새긴다. 인파가 넘치는 중심도로를 정북으로 7~800m나 갔을까, 탑과 성당이 있는 널찍한 광장에 들어서는 것이 아무래도 중앙광장인 듯하다. 구경은 다시 와서 하기로 하고 관광안내소부터 찾는다. 이곳 안내소에는 t자가 하나 더 붙어 it라는 표지가 걸려있다. 두 번째로 찾은 광장의 동남 모서리 it에서 친절한 여직원이 전화로 숙소를 알아보고 예약까지 한 후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준다.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목 빼고 기다리는 필여사에게 급히 돌아온다. 호텔 경비원이 들어오는 차마다 주차료를 받는데 우리 차는 남편이 안에서 숙박을 문의하는 중이라고 말해 두었다는 것이다. 우선 로비로 들어가 화장실을 쓰며 숨을 고른 후 프런트에서 가격을 물어보고 나온다. 경비 아저씨에게 다가가 좀 더 싼 곳을 찾아야겠다, 한 마디하고는 돌아서니 찜찜한 얼굴로 OK한다. 이런 경우 타이밍과 호흡의 승부다. 무엇보다 주춤대지 않는 의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멀지않은 거리라 지도를 보며 비스와 강가에 있는 숙소 근처까지는 쉽게 왔는데 어느 건물인지 알 수가 없다. 길 가던 사람 4, 5명이 머리를 맞대도 못 찾던 것을 두 노인 부부가 가던 일 제쳐두고 꼭 해결하고 말겠다면서 30분 넘게 쫓아다닌 결과 마침내 뜻을 이룬다. 문제는 주소 번지의 3자가 8로 잘 못 적혀 있었던 것이다. 숫자가 짝수로 되면 지도에 표시된 숙소 위치는 도로 반대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된 허름한 빌딩인데 세를 든 모양인 아래층 작은 상점에서 2층에 주인이 있으니 올라가 보라고 한다. 수동 2중 셔터에 덜컹거리는 고물 엘리베이터,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건물은 관리가 허술해 노후했지만 한창때 뼈대 있던 기품이 곳곳에 엿보인다.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에 있던 기품 있는 부인이 궁금한 것을 대략 설명해주고 맞은편 고풍스런 장식의 깨끗한 방으로 안내해 준다. 말로만 듣던 아파트형 숙소로 하루에 150즈워티, 우리 돈 45,000원 꼴로 자동차는 건물 앞 노상에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격리된 우리만의 분위기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식사가 포함되지 않지만 방안에 필여사의 소원이던 취사시설이 있어 대만족이다. 아직 환전을 하지 못해 비자카드로 3일분 450즈워티를 선불로 지급하니 주인아주머니가 시내에서 레스토랑을 하고 있다며 안내 전단을 준다. 저녁식사 때 맥주나 와인을 한잔 곁들이고 싶었는데 동내 가게에서는 유로를 받지 않는다기에 서운하지만 미련을 접는다. 


요기까지 펀글....



아우슈비츠 입구 앞에서... 사실 여기가 뭔지도 모르고 왔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입구쪽에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등 순서대로 Tour Guide가 있어서 따라 붙으면 상세히 

설명을 해준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Tour Guide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된다. 가까이에 따라가면 되는데 왜 무선 

이어폰을 쓰나 궁금했는데 금방 알아챘다..  이곳이 수용소라는 것을 감안하여 Tour Guide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 작게 얘기하는 것을 들으려고 무선 이어폰을 쓰는 것이었다.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입구의 철제 게이트.  위에 만들어놓은 꼬부라진 철근 아치 ‘ARBEIT MACHT FREI’ 는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글귀

인데  내일을 알수 없는.. 생존을 알수 없는 그네들이 이 글을 보면서 매일 드나들던 대문 이라고 한다. ARBEIT의 B자 가 뒤집혀 붙여 있다. 이 간판을 만든 수용소 사람들의 작은 반항이라는 해석이 있다고 한다. 







더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끌고와 이곳 수용소에서 수백만명을 학살 했다.

그 현장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가스실을 차마 볼수도 없었다. 



건물마다 보이는 것들 모두 가슴이 벌렁거리게 한다. 대단히 불편하다.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그냥 중간에 나왔다. 너무 잔인해서...





Posted by daeh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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